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옛날글] 사랑하는 아들에게...(2003년 10월10일작성)

Story Board/준이네집 이야기

by hoon 2006. 9. 13. 08:26

본문

** 오래전 아버지께서 제게 써주인 인터넷 편지글입니다. 그 마음을 잊지 않고자 이곳에 옮겨봅니다. ** 이 Page는 내가 이용할 곳이 아닌데 네가 쓴 편지의 답신이라는 핑계로 그냥 쓴다.

사람이란 젊어서는 反省하며 살고 늙으면 追憶을 먹으며 산다지만, 내 지난 날은 아무것도 자랑 할 것이 없기에 불만과 회한으로 점철된 삶이었고, 그것은 안으로 자학이 쌓이고, 밖으론 자만이 깊어저 세상을 보는 시각이 부정적이면서 비관적이 되어 스스로 실패한 인생이라고 자인하며 살아온 나였다

이 아빠는 오지 산골에서 성실과 근면으로 부모님이 이루신 지극히 평범한 가정의 칠남매중 둘째(장남)로 태어났으며, 아버님이 3대독자이셨기에 친인척이 많지않았지만 귀여움과 기대를 받으며 자랐고, 이웃집 아들 3형제의 옷감을 혼자서 헤어버리는 개구장이로 비교적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낼 수 있었단다. 열다섯 어린 나이로 펴보지도 못하고 꽃망울인체 떠나가버리신 내 누님{敬順}은 그나마 그 반생을 늑막염으로 고생하시며, 여덟살 어린나이에도 혼자서 전주병원까지 걸어가 치료를 받을만큼 똘똘하고 영특한 소녀였고,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음악회에서 그 아픈몸으로도 전교 1등(누나때문에{?} 나는 남자 2등)을 할 만큼 재능도 미모도 갖춘 재원이었는데, 나는 초 겨울 얼음속 논구렁에서 미꾸라지를 잡아 약으로 먹게한 것이 비록 투털대며 한 일이었지만 그 누님에 대한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있을뿐이구나. 그리고 해방동이로 태어났던 남동생{石珍}은 어머님의 병환으로 젖이 부족한데 우유는 없던 시절이고, 미음죽은 토해 내니까 내가 업고다니며 젖을 얻어 먹였는데, 그해 창궐하던 돌림병 천연두에 걸렸지만 병원이나 약 한번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부모님은 밖에 일나가시고 누나는 벙원에 간 사이 그 어린동생은 내 무릅위에서 끝내 마지막 숨을 거두었고 나는 울면서 문을 박차고 나가 엄마를 찾으며 울부짖던 기억이 있단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눈시울이 젖어오지만 그 우람하고 잘 생긴 모습은 내 뇌리에서 지울수 없을거야. 옛말에 떨군 고기가 크고 죽은 자식이 잘 생겼다고 했는데 나는 내 누님과 동생을 생각하며 이 말을 실감하고있단다.

이제 중학생이 되어서는 피난 생활이었지만 그저 평범한 학생이었으며, 2학년때 전국적으로 실시한 IQ검사이후 선생님들의 관심을 받은것 같고, 국어시간에 쓴 고향이라는 내글에서 '문명과 문화의 혜택에서 멀리 떨어저 살아가는 시골사람들은 신의 축복을 받지 못한 자들이지만 그래도 내 고향은 어머님의 가슴에 포근히 안긴듯 산들이 둘려있고 남쪽으로 뻗은 작은 벌판,그 안의 아름다운 사계절, 고풍수럽게 웅크린 전년사잘의 웅장한 자태등을 쓴것'으로 어슴프레 기억되는데 그것이 학생들 앞에서 앍혀지게되고 이를 계기로{?} 가을소풍을 오게 했던일, 무단 결석으로 아버님이 교장{장로님}실에 다녀온후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고 울며 빌던일이 기억에 남아있는 소박한 생활이었던 것 같구나.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비교적 부유한{?} 생활속에 활달한 성격으로 학생회 일도 했었고 전교생 소풍 야유회때는 매번 사회자로서의 끼있는 실력{?}을 발휘할 정도로 적극적인 성격이었으며, 기독학생연합회 헌신에배 기도순서는 거이{?} 내차지였고, 각 교회 학생회의 헌신예배 기도자로서 초빙{?}을 받아 다니기도 했으니까, 주위에서는 법대 아니면 신학교에 진학하리라 생각했는데 용꼬리보다 뱀의머리가 낫다는 정말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 수산대학으로 진로를 결정했고 이것이 내 인생실패의 제일보가 될 줄이야!

자화 자찬의 꼴이다만, 내 고등학교 졸업성적이 1등{3류학교였으니까{?} 가능},서울 생산성본부 주최 전국대학생경제학토론대회 최우수상, 무었을 배웠는지 모르지만 대학 4년의 졸업성적이 개교이래 최고점수였다니까 졸업전 교무처장님이 내 하숙집을 친히 방문하여 학교에 남아달라고 부탁을 하셨는데, 전공과목 참고서 한권이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교수라는 위인은 일본책을 번역한 Note한권 달랑 들고와 읽고 받아쓰는 공부를 했으니 그들에게서 더 배울것이 없다는 건방진 생각으로 그 부탁{?}을 뿌리친 것이 실패의 제이보를 내딛게 되었으며, 군 인사법상 장교의 복무기간이 3년반으로 명기되었다고 믿은 단순한 생각이 내 인생에서 실패의 제삼보가 되고말았단다.

내가 세번씩의 헛걸음을 치는 동안 아버님이 사변중 교회에서 예배를 보았다는 이유로 무수히 구타당하여 얻은 병때문에 47세로 요절하심으로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장남으로서의 책임이 나를 짓눌렀고, 친구의 반대를 무릅쓰고 감행한 결혼 역시 가장으로서의 무게가 더하여저 스스로 돌이켜 볼 엄두조차 내어보지 못한체 안으로 안으로만 쌓이는 회한을 내려놓지 못하고 오늘 여기까지 떠밀려와서, 비교적 활달했던 웃음은 오래전에 잃어버리고 이렇게 망부석처럼 하릴없는 사람으로 변하여 멍청히 서 있구나,

내가 지금 쓰는 글이 자서전이나 참회록도 아니지만 사회적인 제약이나 자라온 환경으로 인하여 자상한 아버지로서 살지 못했고, 사랑한다고 말 안해도 사랑하는 것으로 그냥 믿으며 살아왔기에, 안으로만 뒤틀린 내 처지를 조금만이라도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넋두리를 쓰고 있단다..

네가 신학교를 간다고 했을때 그토록 반대한 것은 내 아들이기에 앞서 하나님의 종으로의 사명이 무었보다 우선이라는 강박감때문이었고, 네가 준이를 낳았을때는 나는 아버지의 무덤앞에서 아버지! 당신의 증손자가 태어낳답니다 제가 아버님께 해드릴 일을 다 할수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드렸으며, 호주에서 너의 목사 안수식과 취임식을 보고 돌아 와서 당신은 두번씩이나 내 아들을 뺐어 가셨으니 모든것을 당신이 책임져 주셔야 하고, 내 가족을 보호해 주셔야 합니다라고 하나님께 떼도 써보았단다

목회자는 금전적인 문제에 초연할 수 있어야 하겠기에 내 가족의 경제적인 문제는 내가 준비한다는 계획을 새웠지만 딸들의 결혼에서부터 장벽이 드리워저 진전이 없고,, 사업의 부진으로 작은 집의 형편이 어려워젔기에 서울 집보다 시골 땅을 일부 정리하여 이 난관을 극복해 볼가 생각중이다.

선산을 가족 납골묘원으로 정리하고, 시골에 아담한 전원주택을 짖는 일이 순조롭게 이뤄지도록 기도해주기 바란다. 이 모든 일이 끝나면 네가 있는 그곳과 이곳을 오가며 살수 있는 건강도 주시도록 기도해다오.

항상 건강에 힘쓰고
네 가정에서 찬송과 기도소리가 끊임 없도록 모본을 보이고
너의 첫 임지에서 성공적인 목회가 되도록 치밀한 계획과 노력을 경주하기 바란다
한국에 오는 일도 교회에 지장이 없도록 결정 하고..... .

교우님들께와 특히 Jeff장노님께 안부를 전해다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